본문 바로가기

작업

TiL - [04] 각성

  옛 성현들의 말씀에 세상에는 사람에게 좋은 삼이 다섯 가지에 사람에게 해로운 삼이 두 가지 있다 하였으니, 그 다섯 가지는 인삼(人蔘)  홍삼(紅蔘) 산삼(山蔘) 비삼(飛蔘) 해삼(海蔘) 이요 두 가지는 중삼(中三) 고삼(高三)이라. 그러한  이유로 집안에 중삼이나 고삼이 있으면 집안이 하루도 편치 않을 것이고, 중삼과 고삼이 함께  있게 되면 그 한해가 세곱절은 고달파진다 하였다.
  우리 집이 그랬다. 세살 텀의 우리 남매는 같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며 학비와 교복문제로 가계에 헤비펀치를 날렸고, 2년 후에는 나는 중삼이 되고 누나는 고삼이 되어 집안 분위기에 로우 킥을 날렸다.
  그래서 잔혹했던 열 여섯 살의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시골에 며칠 다녀올 테니 '제발' 싸우지 말고들 있어라."

  갑작스러운 외할머니의 사고로 병간호차 시골을 내려가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배어있었다. 그리고 시원시원한 누나의 대답과는 달리 내 목소리에는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 내가 가장 우려하는 일은  누나의 '요리'이다. 어느덧 취미로 굳어버린 누나의 '자작 요리'의 몰모트는  항상 나였다. 예전에 소꿉놀이  얘기를 하면서 누나의 요리 센스를 살짝 공개한 적이 있는데, 나이를 좀 먹어도 그 센스는 여전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좀 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들어간다는 정도...일까.
  그 날 저녁은 통생강이 아삭아삭 씹히는 스파게티였다.

  -----*-----*-----*-----*-----*-----*-----*-----*-----*-----*-----*-----

  당시 나는 아이돌 스타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각종  쇼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스타인 서지선은 조각 같은 얼굴과 청순한  이미지로 청소년과 군인 장병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뭐 그때야 그런걸 일일이 신경 써가면서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즈음 서지선은 드라마 하나에 출연 중이었다. 내용은  좀 진부한 신데렐라 콤플렉스성인 것이 소녀 팬층을 공략할  생각이었던 듯 싶은데, 나야 서지선이  나오니까 그저 좋아라 하고 봤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불편한 속을 달래가며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 방에 있던 누나가 스윽-하며 나타났다.

  "야."
  "어, 어? 소, 소리가 큰가? 줄일까?"
  "넌, 공부 안하냐?"
  "고교 평준화가 있으니 굳이 열심히 할 필요는......."
  "그러냐...."

  누나는 쓰게 웃더니 말이 없었다. 나는  또 무슨 심술이 나서 이러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잔뜩 긴장을 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쟤가 서지선이냐?"
  "어? 어... 으, 응......."

  딱 봐도 곤두서있다. 나는 고양이 앞의 쥐 마냥 잔뜩 긴장해 눈치만 살폈다. 소리가  너무 컸을까? 단순히 입시 스트레스? 스파게티 남긴 게 화나 나설까? 대체 뭐지?

  "이쁘지도 않구만."

  ...뭐?
  누나는 흥 하고 코방귀를 끼었다. 그리고 난 나의 프린세스를 모욕당한 충격에 잠깐 의식이 불투명해졌다.

  "무, 무슨 소리야. 이, 이쁘지."
  "저게 이쁘면 나도 연예인 하겠다."
  "어림도 없지!"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의외의 반응에 누나는 동그란 눈이 되었고, 나는 조차도 놀라버렸다. 누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저거 다 고친 거야. 칼 안댄 구석이 없다고."

  라고 했지만 나도 질세라

  "누나를 고치느니 인조 인간을 만들지!"

  ...라고 쏘아붙였다.
  .......
  아아,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명을 재촉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프린세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의 프라이드. 절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누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몸 팔아서 거품 인기로나 먹고 사는 애가 그렇게 좋냐."
  "......뭐!?"

  예상치 못한 반응에 - 분명 주먹이 날아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 잠시 벙찐 틈에 누나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 으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이 프린세스... 누나면 다냐!!

  "무, 문열엇!"

  덜컥. 문은 잠겨있다. 나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객관적으로 이쁘잖아!! 누나보다 이쁘잖아!! 한 이십배쯤! 아, 아니 이백배쯤!!!"
  "쇼를 해라."

  방문 너머로 들려온 시니컬한 소리. 울컥하고 내 안에서 뭔가가 머리를 내밀었다.

  "으와아악!! 나와!! 호박!! 눈 먼 기획사 아니고서는 택도 없을 호바악!!!"

  덜컹-

  "야, 시끄럽고. 가서 생리대나 사와. 대용량으로."

  누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서는 만원짜리를 내 이마에 붙였다.

  .......
  ..........
  ............그리고 내 안에 무언가가 깨어났다.
  .
  .
  "으이이이이이이이이-!!!!!!! 그런 건 직접 사와 이  절벽아!!! 그게 갑빠지 가슴이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나는 이성의 끈을 놓고 누나에게 달려들었다. 맹수와 같은  자세로 달려들어 누나의 머리에 손을 날렸다. 하지만 누나는 코웃음을 치며 내 손목을  잡아 비틀어 공격을 흘리고는 늑막에 단타를 날렸다.

  "크윽!"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몸통으로 들이받았다. 힘에 있어서는 내가 우위다! 하지만 누나는 여유 있게 배대뒤치기(*주1)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커억."

  비명도 크게 못 지를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몸을 데굴데굴 굴러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6년을 맞았다. 지지만은 않는다!

  "사과해애애애애-!!!!!"
  "즐."

  투다다다다다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주로 내 공격은 막히거나 흘려나가거나 빗맞고 누나의 공격은 날카롭게 들어왔지만 나는 급소를 피해가며 악으로 깡으로 싸웠다.

  "와다앗~!!"

  퍼억-!

  치열한 난투극은 어느 순간 일격과 함께 정지화면처럼 멈췄다. 내 주먹이, 누나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혀 있었다.

  "으......."
  "이, 이겼다...?"

  -----*-----*-----*-----*-----*-----*-----*-----*-----*-----*-----*-----

  상상 밖의 전개.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누나를 이겼다? 우리말이지만 이세계(異世界)의 언어 같았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어, 어때! 내 여자를 지키는 남자의 힘이다!!"

  뭐, 사실 내 여자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
  "...누나가 심한 거야!!"
  "......"

  누나가 말이 없다. 이게 또 두렵다.

  "괘, 괜찮아?"

  괜히 - 노린 건 아니지만 - 배를 때린 건가. 그리고 보니 여자의 굉장히 소중한 부분이라고 배운 기억이... 누나, 괜찮으려나?

  "누, 누나?"

  안부를 묻는 내용과는 다르게 누나와의 간격을 자꾸 벌려갔다. 조심스럽게 다시 불러본다.

  "누나...아?"

  자세를 낮춰 쭈그리고 있는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씨익-. 씨익-."

  ...숨을 몰아쉬고 있다?!
  위험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는 순간!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 으히이이이이이이익!!!"

  빠각-!!

  -----*-----*-----*-----*-----*-----*-----*-----*-----*-----*-----*-----

  그 것은 인간의 표정이 아니었다. 얼굴도, 소리도,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마저도... 야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나는 괴성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던졌고, 그것은 애석하게도 재떨이였다. 찰나의 순간, 공포에 질린 나는  전신의 신경이 극도로 민감해져 그  재떨이가 날아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 같았지만 근육이 그것을 피할 만큼 민첩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방어책으로 가드를 올린 오른 손의 새끼손가락이 희생되며 난 생명의 구원을 얻은 것이다.

  .
  .
  .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데굴데굴 굴렀다. 미칠 듯이 아팠다.

  "허억-. 허억-."

  누나도 조금은 놀랐는지 숨을 고르며 바닥을 구리는 날 흘겨보았다.

  "누, 누나... 이거... 부러졌나봐...."
  "허억-. 허억-. 야... 박성환......."
  "...으, 으응?"
  "엄마한테...... 말하면 죽어......."
  ".........."

  -----*-----*-----*-----*-----*-----*-----*-----*-----*-----*-----*-----

  에필로그

  결국 며칠 후 엄마가 돌아온 후  먹는 아침 식사 때 나의 손은  들통나고 말았다. 누나의 코치대로 '농구하다가 삐었어'라는 핑계는 손이  원래 크기의 세배로 불어나는 바람에  완전
실패. 거기다가 의사선생님은 며칠만 늦게 왔으면 평생 못  고칠 뻔했다는 무시무시한 얘기도 들어야 했다.
  엄마는 유력한 용의자로 누나를 지목했지만 누나는 '농구 라잖아?'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은 눈빛으로 일관했다. 결국 엄마가 날  유도심문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 진짜 농구라니까... 크흑."



  주1 : 스트리트 파이터의 류와 켄의 잡기기술로 유명한 그 것. 발로 배대뒤치기 라고도 하며 최근엔 정치계에서 붐이 일어 도장에서 연습을 하시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