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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잡기

마지막 편지

  난 처음부터 그 남자가 싫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남은 동물적 감각이었는지, 나는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미묘한 거리감과 적대감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나는 그 남자보다 우월하다고 자신했고 믿었습니다.

  그 남자의 친절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고 배려하길 좋아하는 그 사람의 캐릭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친절을 베푸는 것 처럼, 나에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 것 처럼, 당신에게 베푸는 친절 또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내 둔함 때문일수도, 혹은 근거 없는 내 자신감과 우월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휴일인데 만날 사람이 너무나 없으니 인천으로 놀러오겠다고 했었습니다. 나는 그 날도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먼저 그 남자와 만나고, 나는 퇴근하자 마자 합류하기로 했었습니다. 도착했을 때 당신은 이미 꽤 취해 있었고, 그 남자는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나에게 진한 키스를 퍼부은 당신은 그 날 유난히 자학과 함께 나에게 응석을 부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투정을 부린 일이 기억납니다. 헤어지자는 말. 그 말이 무서워 나는 입에 담지도 못했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쉽게 말하느냐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당신이 그랬지요. 그건 튕기는 거라고. 가끔은 그래야 한다고. 대신 꼭 잡을 것 같을 때만 하는거라고.

  그 날도 그 생각이 났습니다. 그 즈음 심란했던 나는 당신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고, 그걸 거절한 당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언쟁이 높아지던 나는 당신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습니다. 그 타이밍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 때 내가 느꼈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로 인해 다시는 그런 말을 함부로 나에게 하지 않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잡지 않았습니다.

  며칠 간은 초조하지만 애써 참았습니다. 당신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또 내가 사과한다면 나쁜 반복이 계속될 것 같아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딱 하루만에 마음을 모두 정리했다며 친한 누나 동생으로 남자는 말을 하며 당신은 웃었습니다.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당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꾸 너 비슷한 사람만 보게 돼. 그 순간 그 남자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보같게도 또 위기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정말 나는 농담삼아 말했습니다. 그 남자랑 사귈거야 그럼? 그러자 당신은 말했었지요. 그래도 돼? 라고. 그 순간의 불길함을 난 농담을 하며 지우려 했었지요.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는 짧은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고, 당신은 아는 동생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는 친절함으로 나를 맞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힘들때 눈물이 날 때 이를 악물 때 나는 당신을 생각했는데, 당신이 나를 대하는 것이 나를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은 게임 길드 사람들을 보러 광주에 내려가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하루가 지나서였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당신이었지만, 외박을 쉽게 하지 않는 당신이었는데, 광주까지는 누구와 갔으며 숙박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불안한 나는 겸사겸사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신의 전화는 그 남자가 받았습니다. 정말로 광주에서 사람들과 모여 술을 먹고 있었지요. 근데 참 운명의 장난질이라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하필이면 그 남자는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전화를 받은 거지요. 그 남자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습니다.

  넌 누군데 남의 여자한테 전화질이야?

  당신이 그 남자와 나보다 먼저 만나던 날에도 비슷한 장난을 친 게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웃어넘기며 당신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 말이 머리를 맴돕니다. 당신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누나 그 형이랑 사귀는거야?

  ...응. 그럴 생각이야.

  진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농담이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는 탓인지, 그 순간엔 정말 그게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정말이더군요.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덥고 관자놀이가 핑핑 돌았습니다. 눈 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가빠졌습니다.

  누가 먼저 그 얘긴 꺼낸거야?

  오빠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기가 느껴집니다. 당신은 계속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평일에 나를 찾아오겠노라고 했습니다. 거절한 나는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몇번 걸어도 받지 않자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그 남자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형이 먼저 얘기 했어요?

  응 그랬다. 나람아. 내 얘기부터 들어봐. 나는 미인이 정말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형은 나이도 있고 이제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을 때가 아니야. 형은 정말 진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한거야. 오늘 광주 온 것도 여기 형들한테 조언도 구할 겸 해서 온거다.

  나는 왜 그 남자가 나에게 자신의 진심을 이해시키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너 정말 미인이 안볼거냐?

  네.

  나도 안볼거냐? 길드 사람들 아무도 안 볼거야?

  네.

  미인이 친구들이랑도 안 볼거야?

  최대한 그러려구요. 형. 형을 위해서도 그게 나을 것 같지 않나요? 내가 계속 관심 가지고 미인 누나 찐따 붙으면서 형 괴롭혔으면 좋겠어요? 내가 부탁할게요. 날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저 안 만나고 싶어요. 안 보고 싶구요. 내가 정리가 되고 괜찮아지면 먼저 연락 할게요.

  그래. 대신 약속 하나만 해 줄래? 네 마음이 정리가 되면 미인이 말고 형한테 먼저 연락 해다오. 형이랑 술 한잔 하면서 얘기나 하자.

  네. 그래야죠. 이제 형이 누나 남자친구 되면, 그렇게 하는게 순서에 맞게 되겠죠.

  마지막 이야기는 이를 악물고 했습니다. 울음이 목까지 차올라서 그렇지 않으면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당신의 번호도 그 남자의 번호도 그리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번호도 지워버렸습니다. 다신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겠죠. 그리고 그게 더 낫겠죠.

  모든 원인의 제공은 내가 했습니다. 내가 헤어지자고 했고 헤어지고 난 후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지만, 나는 왠지 큰 배신감과 상실감,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과 그 남자는 다정하게,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올라왔겠지요.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고, 큰 이변이 없다면 그 남자는 자신의 바람대로 당신과 영원한 가약을 맺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결혼에 대한 갈망도 채울 수 있겠지요. 내가 당신을 잡으면 두 사람이 불행하고 내가 당신을 놓아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유치한 산수를 하며 잘 된 일이라고 믿으면 될까요.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습니다. 최대한 완전히. 가급적 완벽히. 내가 운이 좋다면 좀 더 빨리 이 상처를 잊고 당신들을 잊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운이 나빠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당신들이 영원한 약속을 맺는 순간 까지는 당신들과 격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나의 증오를 거름으로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