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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TiL - [02] 소꿉놀이, 그 후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소꿉놀이를 한동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녹황색 잡초의 공포도 씻기어지고, '원하지 않는 식사는 안 먹을  수도 있다'라는 조건을 달고 다시 소꿉놀이 계로 복귀했다.
  아아, 시대를 불문하고 인기남(...)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기는 막을 도리가 없고, 그에 따른 질투 또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나는  항상 동네 남자애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나를 싫어한 녀석은 나보다  한 살 많은 동네의 골목대장 녀석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애랑 내가 유달리 친하게 지낸 탓이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그럭저럭 유지되던 녀석과 나의 사이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터지고 말았는데, 그 여자애가 자꾸만 장난을 거는 골목대장 녀석에게  '너 같은 애들은 정말 싫어. 성환이랑만 놀 꺼야!' 라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 말에 눈에 쌍심지가 켜진 녀석은 곧장 나를 찾아왔다.

  "야!!! 너! 앞으로 혜미랑 놀지마!"

  뜬금 없는 소리였지만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소극적인 나라도 응, 하고 단번에 수긍할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니가 뭔데?"

  아아, 용감했다. 하지만 녀석은 콧방귀를 뀌며

  "어디 놀기만 해봐. 뒤졌어."

  라며 위협적인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녀석의 경고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까맣게 잊은 채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왠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돌아보니 골목대장 녀석과 그 패거리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특히  골목대장 녀석의 눈은 당장이라도 불꽃이나 빔 따위를 쏘아낼 것 같았다.

  "야!! 너! 내가 혜미랑 놀지 말라 그랬잖아!"

  아리송해 있던 혜미도 상황을  눈치채고 당황하기 시작했고,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오기인지 여기에서 쉽게 수긍하고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빨리 꺼져 이 자식아!"
  "싫어!!"

  무엇인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에 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녀석을 밀쳤다. 그리고 그로 인해 녀석도 약이 바짝 올랐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숨을 씩씩 몰아쉬는 녀석을 보고, 뭔가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나 꺼지셔, 개똥."

  .......
  아니 뭐, 욕설의 센스나 수위에 있어서는 별 다른 언급을 말자. 중요한 건 그 말에 녀석은 마인부우가 스팀 뿜어내듯 화가 났다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녀석은 날뛰는 이성을  주체하기 힘든 듯 복잡하고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며,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때가 되어서야 내가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한 순간....... 그 녀석은 뾰족한 돌멩이를 집어들어 내 관자놀이를 향해 스트레이트로 힘껏 내리찍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누나에게 맞으며 훈련된 솜씨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손톱 반마디 만한 찢어진 상처만을 남긴 채  충격적인 우발적 살해행각을 미수로 그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서 나는

  "우아아아앙-"

  하고 울어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를 본 녀석은 덜컥  겁이 났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패거리들과 꽁무니를 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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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던 나는 혜미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왔다. 상처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한참을 울고 서 있었던 탓에 얼굴이며 상의가 피범벅이 되어 엄마를 기절 직전으로 만들었다. 사색이 된 엄마는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내다가 상처는  아주 작다는 걸 알고서야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도 무척 놀란 듯 나를 부축하고 온 혜미에게

  "누구야! 누가 그랬어! 너냐!? 너냐!?!?"
  "아, 아뇨......."
  "그럼 어떤 놈이야! 넌 가만히 구경만 하면서 뭘 한 거야! 어디서 그랬어!"

  등등 쉴 새 없는 질문 공세로 혜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누나는 '그렇구나'하면서 단번에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심각한 무언가를 고민하던 누나는, 내
치료가 끝나자마자 손을 붙잡고 복수를 해주겠다며 놀이터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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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했다. 평소에 누나가 나를 쥐고 사는 편이라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를 상대로 했을 때의 얘기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은 게 덩치는 네 살은 많은 것 같은 동네 골목대장을 상대로 이기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누나의 마음은 무척 고마웠지만 누나마저도 그 녀석과 싸워서 지는 건 굉장한 굴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꽁무니를 뺏던 패거리 녀석들은 눈치를 봐서 빈 놀이터로 돌아와 다시 놀고 있었다.

  "정환이가 어떤 놈이얏!!"

  말릴 새도 없이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는 마음으로 이를 꽉 물었다. 정환(골목대장)이라는 녀석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래더니, 내가 생각 이상으로 멀쩡하자 안심을 하며 비열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근본부터 잘못 된 녀석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철저한 가정교육으로 저런 녀석을 만들지 말자)

  "쫄아서 누나를 데리고 왔냐?"
  "왜, 여자는 이길 자신이 없어?"
  "뭐?"

  녀석은 누나의 말이 아주 가소롭게 들린 모양인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또래에 비해 동치가 곱절은 되는 녀석이었고 누나는 여자애가 아닌가.

  "여자라고 안 봐준다."
  "좋을대로."
  "진짜 울어도 난 몰라."
  "네가 울면서 '잘못했습니다 여왕님' 해야 될걸?"

  꿈틀. 녀석의 얼굴에 도발이 제대로 먹힌 표시가 났다.

  "누, 누나. 정말 싸울거야?"
  "물러나 있어."
  "우랴아아아-!"

  누나가 틈을 보인 사이에 녀석이 달려들었다.  불과 세 걸음 거리. 체격차를 이용한  숄더 어택으로 선공을 먹일 심산인 듯 했다. 누나는 몸을 낮게  숙여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어 몸을 살짝 틀어 녀석의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어어... 빠져나갔겠다?!"
  "음......."

  누나는 입술을 깨물며 뭔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대쉬를 흘려내며 만든 거리는 5보(五步). 다시 녀석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우랴아아아아아아아-!"

순시간에 좁혀지는 거리. 누나는 또  낮은 자세로 녀석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부웅-! 하고 녀석의 주먹이 날아왔다. 누나는 고개를 살짝 틀어 주먹을 피해내고, 왼발을 땅에 디디며 그 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오른쪽으로 휙 틀었다. 누나의 긴 머리가 찰랑 하고 흔들렸다.

  "타앗!"

  누나는 기합소리를 넣으며 녀석의 다리를  걸었다. 녀석은 앞으로 돌진하던  힘에 다리를 걸리며 앞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그러나, 누나는 녀석의 면상을 잡고는 뒤로 힘껏  밀어버렸다.

  "우와와왁!"

  완전히 중심을 잃은 커다란 덩치는 볼품 없이 휘청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누나는 흐름을 타듯 틈을 주지 않고 녀석에게로 달려가, 녀석의 X알에 강력한 킥을 먹였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 남자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고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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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했습니다, 여왕님!"

  승산 없어 보이던 싸움은 순식간에 예상외의 결말을 낳았다. 녀석은 당겨올 아랫배(...)의 고통을 이겨내며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다. 고통 때문인지  굴욕감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좍좍 흘리면서.

  "어때, 이 정도면 복수가 될까?"
  "어... 응. 무, 물론이지! 정말 고마워 누나."

  누나가 생긋 웃었다. 빛이 나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럼 나랑 소꿉놀이 하자."
  "......."

  빛이 나는 미소란 말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