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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TiL- [01] 엄마는 여자보다 강했고, 누나는 엄마보다 무서웠다.

  나보다 세 살 위인 누나를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일컫는다. '독한 기집애'
  예쁘장한 생김에 여성스러운 성격,  아버지를 여의고 나와 엄마의  정신적 지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약대까지 장학생으로  한번에 붙은 '강철의 천사'라는 식의  얘기들이다. 하지만 누나의 또 다른 이면을 생생하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쉽사리 인정하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나와 누나는 부드러운 가풍과  아버지의 자유로운 교육 방침에 따라 자라났다. 다만 조금 문제라면 누나는 당차고 씩씩한 여장부로, 나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가 되어버린 것 정도. 그래서 친척 어른들은  우리 남매를 볼 때마다 '너희들은 성별을  바꿔서 태어났다' 라면서 놀리곤 했었다.
  성격이야 어찌 되었든 어릴 적 나는 동네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는데, 그건 단순히 소꿉놀이를 해 주는 남자애가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왠지 인기가 많았다기 보다는 필요에 의해 수요가 증가했을 뿐이라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매번 '집안일  하는 남편'으로서 성실하게 밥도 하고 빨래도 했다.
  한번은 누나가 소꿉놀이를 하자며 졸랐다.  평소에는 늘 '나는 이제 국민학생이니까  그런 놀이는 안 해.'라고 하더니 정작 내가 같이 놀아주지 않자 무척 심심했던 모양이다. 묘한 승리감이 든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는데, 그건 큰 실수였다.
  어쨌든 성격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현모양처를 자청한 누나 때문에 나는 회사에 다니는 남편 역할을 처음으로 해 보게 되었다.

  "너는 힘든 회사 일에 녹초가 된 회사원이야. 큰 소리 치는 상사에게 시달리면서 항상 일탈을 꿈꾸지만 아직 몇 년이나 남은 주택융자가 남아있어 그저 잘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숨죽이는 수밖에 없지. 그런 남편을 맞아주는 아내를 보며 아직은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당연히 무슨 소린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힘든 일을 하는 남편역'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넌 지금부터 놀이터 10바퀴를 뛰고 정글짐을 다섯 번 올라갔다 와."
  "...왜?!"
  "그래야 힘들어 보이잖아."

  싫었다. 하지만 누나에게 싫다고 말하는 편이 더 싫었다.

  "헉, 헉, 누나. 다 뛰었어."
  "누나가 아니잖아. 여보라고 해야지."

  그리고는 나를 훑어보더니,

  "아직 할만해 보이네. 다시 한번 뛰고 와."
  "......또!?"
  "싫어?!"
  "아냐아냐. 다녀올게."

  ...악마.

  "헤엑- 헤엑- 다녀왔어."
  "어머, 수고하셨어요. 많이 힘드시죠?"
  "어...으응."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 정도로 누나는 상냥한 아내의 연기를  잘했다. 힘이 들어 잔뜩 짜증났던 기분도 날아가고 순식간에 소꿉놀이에 몰입되는 기분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응, 그...럽시다."

  누나가 차려온 밥상에는 나뭇잎과 잡초, 꽃잎 등을 으깨놓은 덩어리에 분꽃 씨 가루로 데코레이션을 해서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음식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색이 다소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이걸 준비하려고 일부러 이상한 일을 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재미있었다.

  "잘 먹을게."
  "네에."

  나는 정말 최대한 맛있는 표정을 지으며 떠먹는 시늉을 했다.

  "지금 뭐하는거야?"
  "응? 왜?"
  "왜 안 먹고 먹는 척 만 해?"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어... 어...."
  "빨리 다 먹어."
  "지, 진짜?"
  "어서 먹어."

  싫었다. 하지만 그냥 먹는 것 또한 싫었다.

  "시, 싫어......."
  "먹엇!"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현모양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누나의 눈 속에서는 악마가 콧구멍으로 불을 뿜으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누나의 말투에는
전혀 악의가 담겨있지 않아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것'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욱- 하고 밀려오는 역한 냄새. 녹황색 잡초(...)의 쓴내가 밀려왔다.

  "맛이 이상...해."
  "끝까지 먹어."

  누나의 단호한 눈빛.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눈을 꼭 감고 한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우물우물우물...우욱.

  목에서 뭔가가 비집고 올라오려고 했다. 내뱉을쏘냐. 나는 이를 악물고 입 안의 것들을 한번에 꿀꺽 삼켰다. 입안에 풀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드시니 얼마나 좋아요. 자, 이제 안마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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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그 날 저녁에 일어났다. 저녁밥을 먹던 내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면서 먹던 음식을 토해내고,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더니 이윽고 탈수현상까지 보인 것이다. 나는 긴급하게 응급실로 호송되었고 위세척 끝에 간신히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에  기쁨과 무상함을 느끼며 누워있는데,  의사가 복잡한 표정으로 와서는 엄마에게 물었다.

  "대체 애한테 뭘 먹이신 겁니까. 상록수 이파리에 잡초며 쑥이며 은행나무 잎까지 나왔습니다."
  "아니 그게... 그럴 리가....... 너 왜 그런걸 먹었니!"

  당황한 엄마의 다그침. 억울한 기분에 눈물이 핑하게 돌았다. 엄마에게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엄마의 뒤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날 보는 누나가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냥 먹었어. 그냥."

  그리고서는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묵비권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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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을 취하고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가 방을 나간 후 방에는 나와 누나만이 남았다. 누나는 엄마가 방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 한 후에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좋은 생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분꽃 가루가 문제였을 거야. 다음에는 안 넣을게."

  ......다시는 소꿉놀이를 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했다.


  덧붙이는 글 - 고등학교 때 썼던 글. 오년쯤 지난 지금까지도 마무리를 못 하고 있다.

  내 친구와 친구의 누나에게서 착안한 이 남매의 이야기는 실제 모델이 된 남매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 그리고 주변의 이야기들을 뒤섞어 만들어졌다. 지금 와서 보면 내용은 유치하지만 캐릭터는 잘 살아있는 것 같아서 흡족한 마음도 든다. (이런 걸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지)

  사실 슬랩스틱 코미디와도 같은 이런 글이지만 한 화를 쓸 때 마다 나름대로 실험적인 시도를 하나씩 넣어가면서 작품에 임했다. 무슨 실험을 했는지는 맞춰보시라.